신자의 자리로 C.S.루이스(C. S. LEWIS) 지음

신자의 자리로 표지

 

  • 출간일2020.11.18
  • 브랜드두란노
  • 책분야
  • 페이지196p / 125*190(mm)
  • ISBN9788953138766
  • 원서명How to Be a Christian
  • 출간예정
그 나라를 향한 순전한 여정

참된 신자로 빚어지는 오랜 노정,
좋은 길벗이 되어 줄 실전의 지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실천한 사람” C. S. 루이스
그의 일상을 뚫고 나오는 복음의 충만한 빛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같은 기독교 고전의 작가이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오랜 시간 영문학을 가르쳤던 존경받는 스승,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칭송받는 C. S. 루이스. 이 시대를 사는 무수한 신앙인들이 그의 치밀한 영적 탐구와 빛나는 지혜에 빚을 졌다. 그의 수고 덕에 우리는 차마 해석하지 못하고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우리 마음과 신앙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심오하고 생동감 넘치는 기독교 변증과 해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도록 지금껏 수많은 신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루이스의 뛰어난 논증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실천한’ 깊은 지혜에서 발원했다. 신앙의 진수를 삶으로 체험한 사람만이 그토록 정곡을 찌르는 탄탄한 논리로 진리를 변호할 수 있다. C. S. 루이스의 작품들에서 ‘믿음의 실천’을 다룬 최고의 글들을 엄선한 책, 《신자의 자리로》에서 기나긴 신앙의 노정에 필요한 지혜를 얻으라.

사랑받는 작가 C. S. 루이스의 전작에서 엄선했다!
영생을 맛보는 찬란한, 그러나 평범한 순간들에 관하여

관념에 머무르는 신앙에서
일상 속 약동하는 신앙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루이스의 여러 명저들을 포함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글 가운데 ‘믿음’과 관련한 글을 선별해 엮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만 아니라, 어떻게 믿음을 실천할 것인가를 밝힌다. 장별로 이 땅에서 신자로 살아가면서 고민이 되는 지점들을 질문 형식의 제목을 달아 제시했고, 루이스의 다양한 글들에서 그에 해당하는 대답을 찾아 실었다.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 타협하지 않고 지켜야 할 자리를 통찰력 있게 그린다.

각각의 본문은 단순히 이 땅에서 옳게 신앙하는 법을 넘어, 신자가 마침내 이를 영광의 나라, 그리스도인이 누릴 영원한 삶을 그린다. 머리로 배운 성경 지식들을 내 삶의 현장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기에는 현실이 참으로 퍽퍽하며 만만찮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고된 여정 끝에 우리가 마침내 도착할 그 나라, 기쁨의 그날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보여 줌으로써, 이 험한 세상을 끝까지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신자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


지은이 _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
20세기 지성의 거장이자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있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무신론에 심취했으나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는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작가로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오랜 시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1954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 학과장으로 일했다.
30여 권의 폭넓은 저서를 통해 다양한 독자층과 만났으며, 지금도 수많은 새로운 독자들의 손에 그의 작품이 들려지고 있다. 가장 널리 읽히는 대표작으로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네 가지 사랑》, 《예기치 못한 기쁨》, 《고통의 문제》, 《개인 기도》,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상 홍성사), 현재까지 1억 부 넘게 판매되고 세 편의 장편 영화로도 제작되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전 <나니아 나라 이야기> 시리즈(시공주니어) 등이 있다. 최근 ‘기도의 위력과 실천’을 다룬 그의 글을 모은 《기도의 자리로》(두란노)가 새롭게 선보였다.

옮긴이 _윤종석
《예수의 길》, 《하나님의 임재 연습》,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이상 두란노)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한 전문번역가다.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골든게이트침례신학교에서 교육학(M.A.)을, 트리니티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상담학(M.A.)을 전공했다.


* C. S. 루이스를 향한 찬사
옥스퍼드의 명사이자 케임브리지 교수인 그는 필시 생명력이 장구할 것이다. 공룡처럼 한물간 존재라는 자평과는 달리 그의 글은 늘 독자들의 현재 자리로 찾아가는 호소력이 있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기지와 지혜와 문체와 학식이 천국 문을 통과하는 필수 요건이라면 루이스는 천사의 반열에 들 것이다.
<뉴요커>(The New Yorker)

20세기의 어느 작가보다도 루이스의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이들은 자신의 철학적 전제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


차례
엮은이의 글

* 신앙의 긴 여정, 어디까지 왔는가?
* 신자는 모름지기 ‘영적’ 활동에 24시간을 바쳐야 하는가?
* 품기 힘든 ‘문제적 그 인간’이 있는가?
* 재림의 복음, 나의 오늘을 어떻게 바꾸는가?
* 줄기찬 일상 속 도발, 용서를 계속 실천하려면?
*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면서 부인할 수 있는가?
* 신앙이란 이성(理性)에 맞서 싸우는 것인가?
*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
*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제대로 심겼는가?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의 참뜻은?
* 영광에 이르는 절묘한 길,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 과학과 지식의 발전이 기독교의 불변성을 위협하는가?
* 아직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듯 행동하면 위선인가?
* 교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려면?
* 삶의 현장에서 ‘신자다운 선택’을 고민하는가?


출전


본문 맛보기
<22쪽 중에서>
처음에는 도덕과 의무와 규율과 죄와 덕이 기독교의 관건인 것 같지만, 기독교는 우리를 이 모두에서 이끌어 내
그 너머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어렴풋이 내다보이는 그 나라에서는 혹시 농담으로라면 몰라도 이런 것들이 전혀 화젯거리가 못 된다. 거울이 빛으로 가득하듯이 거기서는 모두가 선(善)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선은커녕 그 무엇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의 근원이신 그분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나마 이는 현세를 떠나 내세로 들어서는 길목의 근처일 뿐이다. 그 너머까지 아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8, 30-31쪽 중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무리 초라한 자연적 활동도 하나님께 드리면 그분이 다 받아 주시지만, 아무리 고상한 일도 그분께 드리지 않으면 다 악해진다. 기독교는 그저 자연적 삶을 새로운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소재를 초자연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새로운 질서다. …(중략)…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도 파출부의 일도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만 영적이다. 즉 “주께 하듯” 겸손히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청소 일을 할지 교향곡을 작곡할지 정하는 문제를 순전히 우연에 맡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수탉은 울어야 한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지만 분화된 지체라서 각기 소명이 다르다.

<52-53쪽 중에서>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 밤”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미친 듯이 세상에 만병통치약을 투여하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평범한 도덕과 지혜의 한계 내에서 성심껏 미래를 위해 쏟는 노력은 그렇지 않다.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충실하다 심판을 맞이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냥 밖에 나가 돼지를 치는 사람이든, 선한 구상으로 백 년 후의 인류를 크나큰 악에서 구하려는 사람이든 다를 바 없다. 마침내 극의 막이 내리면 돼지는 더 이상 먹이를 얻지 못하고, 백인의 노예제도나 정부의 폭정을 퇴치하려는 큰 싸움은 승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검사관이 오실 때에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지켰다.

<60-61쪽 중에서>
두 번째 해법은 죄 사함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변명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실제로 믿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다. 내 쪽에 유리한 변론으로 하나님을 납득시키지 않는 한 그분이 나를 다시 받아 주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아예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모든 정상이 참작되고도 변명의 여지없이 남아 있는 죄를 그 속의 모든 섬뜩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의까지 똑바로 응시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온전히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용서이며,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그렇게 용서받을 수 있다.

<139쪽 중에서>
선과 악은 둘 다 복리로 불어난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이 한없이 중요하다. 오늘의 소소한 선행으로 적의 전략적 거점을 점령해, 거기서 당신은 몇 달 후면 여태 꿈꾸지 못했던 승리를 향해 진격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 사소해 보이는 정욕이나 분노에 빠지면 능선이나 철도나 교두보를 잃어, 거기서 적이 다른 수로는 불가능했을 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