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힘

story 2020년 01월호 나를 지키는 힘 글 백소영

“아휴, 이렇게나 치명적으루다가 매력적이신 분이 막 밤길을 다니고 그러시면 위험해서 안 돼유. 제가 경찰이니께 지켜드릴게유.” 설마 경찰 본분을 다하기 위함‘만’이었을까.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동백’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용식’은 한동안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사윗감 1호’요 아가씨들의 ‘남친 1순위’였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이야기다. 극 중 남자 주인공 용식을 맡은 배우의 훈훈한 외모 때문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저렇게 촌스럽고 맹목적으로 달려든다면 그건 이야기가 다르다는 ‘현실주의적’ 시청자들의 반응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극 중 여주인공인 동백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가정환경에, 외모는 훨씬 더 치명적으로 보이는 ‘향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주겠다는 남자가 없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결국 향미는
비 오는 어느 늦은 밤 배달을 나갔다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여 극이 전개되는 동안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동백이와 향미의 인생을 비교하며 안타까워했다.

알고 봤더니 향미는 동백이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고 한다. 당시 불우한 환경 때문에 급식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던 두 명 중 하나였다.
일곱 살에 친엄마에게 버려졌던 동백이는 보육원에서 자란 까닭에 급식비를 면제받았고, 엄마가 술집을 하신다는 다른 아이는 거의 방치된 듯 지냈다. 동백은 서른 중반 자신이 차린 ‘카멜리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면서 찾아온 향미가 그때 그 아이임을 알지 못했다. 실은 향미의 본래 이름이 ‘고은’이라는 것도 시체로 발견된 뒤 주민등록증을 통해서 알았다. “향미가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드라마 안팎에서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평소 왜 그렇게 돈을 밝혔나 했더니 유럽으로 공부하러 떠난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 학비를 대었었나 보다. 코펜하겐에 가는 것이 꿈이라고 해서 헛바람이 든 철없는 여자라 생각했는데, 덴마크 코펜하겐에 동생이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혼해서 가정까지 꾸렸나 본데 아내의 병원비까지 누나에게 의지하면서도 정작 누나가 가서 함께 살겠다고 하자 남동생은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아내와 아내의 가족들에게 소개하기 창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향미는 그렇게 마지막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러니 비록 친어머니께 버려진 데다가 미혼모로 아들을 낳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지언정, 집도 가족도, 더구나 목숨 바쳐 지켜 주겠다는 남자도 있는 동백이와 비교할 때 얼마나 가여운 존재인가 말이다. 하여 작가가 동백에게만 너그럽고 향미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반응들도 꽤 있었다. 향미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쯤, 지켜 주는 사람 하나쯤은 만들어 주지. 어쩌자고 동백이를 대신해서 밤 배달을 나갔다가 동백이로 착각한 범인에게 개죽음을 당하게 만드느냐는 ‘항변’이었다. 그런데 극의 마지막 두 회를 시청하면서, 내 눈에 동백의 삶과 대비된 ‘불쌍한’ 인물은 향미가 아니라 오히려 향미를 죽인 범인인 ‘흥식’이었다.

혹자는 이 드라마가 ‘엄마를 가진 사람들이 지켜지는’ 스토리라고 말한다. 향미와 흥식이는 그 공식 안에서 ‘엄마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향미는 자기 인생 하나 건사하는 것이 버거웠던 엄마에 의해 사실상 버려진 아이였고, 흥식이는 편부 슬하에서 자라는 동안 유난히 예민하고 삐뚤어진 성품을 품어 주는 따듯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였으니. 이와 대조적으로 용식이는 비록 유복자였으나 막내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동백이 역시 일곱 살에 버려진 아픈 기억이 있지만 알고 보니 엄마는 동백이를 지켜 주려던 것이었다.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 나와 지독한 가난을 겪는 동안 함께 배곯는 딸이 안타까웠기에 밥이라도 실컷 먹으라고 보육원에 ‘잠시’ 맡겼다는 거다. 우여곡절 동선이 어긋났던 것도 엄마 잘못은 아니었고, 동백이 미혼모가 된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몰래 숨어 지켜보면서 딸의 목숨도 구해 주고 손자도 지켜 준 세월이 오래라 한다.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단다.” 신장을 투석하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경에서도 딸만 생각하는 엄마의 애절한 고백에 어찌 동백이만 울었을까? 아, 그래.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지켜지는 거였어. 그래서 결국엔 행복해지는 거였어. 향미랑 흥식이는 이런 엄마가(그리고 애인이) 없었던 거야. 이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비가 오는 날, 달랑 1인분을 배달 나가려는 동백을 기어이 집에 돌려보내고 대신 나갔던 향미는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을 몰랐던 한 ‘불쌍한’ 남자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었다. 만약 동백이가 그대로 배달을 나갔더라도 현실에서라면(아무리 용식이와 엄마가 있어도)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거다. 그래서 동백이와 대비되는 사람은 향미가 아닌 흥식이라고 한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혹은 멸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내 존재를 맞추어버린 것, 그러니까 ‘나를 나답게 지켜내는 힘’을 가지지 못한 까닭에 흥식은 더 열악한 상황의 동백과는 다른 결정, 다른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요. 이렇게 태어난 건지, 이렇게 길러진 건지.” 어려서부터 예민한 청력 때문에 시끄러운 길고양이들을 잡아 죽이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근심을 했다. 청년이 되자 아들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 아들이 목표로 삼은 사람들에게 미리 피하라고 그들의 생활 반경 내에 불을 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이 살인을 하러 가는 날에는 꼭 아버지 신발을 신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나중엔 시체 처리를 돕거나 자기가 범인인 양 행동하기도 했다. 흥식이 아버지도 나름 아들을 지키고 싶었겠지. 하지만 내 이야기는 삐뚤어진 부정에 대한 것이 아니다. ‘멸시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에 대한 것이다.

“용식 씨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다 보면 내가 정말 꽤 괜찮은 사람이고 막 대단하게 느껴져요.” 동백은 자신을 멸시하거나 불쌍히 보는 사람들 속에서 늘 주눅 든 모습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칭찬을 해 주는 용식이 덕분에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다. 하지만, 동백이 자신도 몰랐으리라. 동백은 이미, 늘 대단했다. 능력이 출중했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극한 상황에서도 항상 대단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쌍히 쳐다본다고 정말 불쌍해지지 않는 선택, 나는 버려졌지만 내가 버리지는 않겠다는 선택, 그 선택이 아들 필구를 살렸고 향미를 감동시켰다. “아니, 왜 돌아왔어?” 동백의 돈을 훔쳐서 코펜하겐에 사는 동생에게 보냈던 향미가 동생에게 버림받던 날, 그래서 돌아갈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던 날, 향미는 동백에게로 돌아왔다. 언젠가 동네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동백은 너무나 당연하게 향미도 같이 가는 계획을 이야기했었다. “왜? 왜 나도 같이 가는 거야?” 향미의 질문에 동백은 답했었다. “우린 가족이잖아.” 동백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힘은 거기 있었다. 나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버리고 멸시하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입증하지 않았다는 것. “가소로워서요.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불쌍한 동백이가 나를 챙겨줄 정도로 내가 더 불쌍한 사람인가? 동백이 너도 까불지 마라. 그래서 죽이려고 했어요.” 흥식이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불쌍한 순서대로 하향 서열화를 시키는 사람들의 시선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킨 것, 그래서 어느덧 자기마저 익숙해진 그 존재의 사다리에서 자기 밑이라고 생각했던 동백이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아서 들었던 분노, 그것이 흥식이를 연쇄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린 거다.

세상은 언제나 멋대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 왔다. 백 점짜리, 팔십 점짜리, 기준 미달…. 그러나 그런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본다면, 인정한다면, 그리고 같은 시선으로 너를 바라본다면, 그 시선과 삶의 선택이 나를 지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인간을 존귀하게, 대단하게 지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백소영은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강의로, 글쓰기로, 그리고 대중 특강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배우고 삶에 관여하는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저서로 「드라마틱」,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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