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정신이 숨을 쉬는 교회들

issue 2019년 03월호 3·1운동 정신이 숨을 쉬는 교회들 빛과소금

100년 전, 억압과 압제의 그늘 아래 정의와 자유의 불꽃이 일기 시작하자 ‘만세’ 소리가 이 땅을 흔들었다. 분연히 일어선 ‘항거인’들 앞에서 ‘교회’는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안동교회 유경재 원로 목사는 지난해 3·1절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3·1운동 정신을 정의한 바 있다. 

“3·1운동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모든 압제에 항거하여 싸울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민족의 독립이란 차원을 넘어 모든 악에 대한 항거요, 불의에 대한 타협의 거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의 정신입니다.”

한 세기가 흘렀다. 여전히 그 정신의 유산을 소중히 지키는 교회들이 있다. 구암교회, 매봉교회, 제암교회도 그 교회들 중 하나다. 과거로부터 바람을 타고 온 만세의 함성이 세 곳의 교회에 잠시 들른 방문객의 마음을 두드렸다.

취재 이승연 사진 정화영, 김주경

 

 

 

한강 이남 최초 3·1운동 발원지

군산 구암교회

겨울 공기가 맑아서인지 멀리서 사납게 불어오는 해풍 소리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린다. ‘군산 3·1운동 역사공원’ 입구 어귀 돌담 자락에 붙어 있는 한 문구가 눈길을 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의 숨결이 깃든 현장에서 저 문구는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들 만큼 비범한 중력을 느끼게 한다. 공원 안쪽, 이제는 ‘3·1운동역사영상관’으로 바뀐 과거의 구암교회가 보인다. 맞은편으로 7인의 선교사와 장인택 조사의 이름을 새긴 여덟 기둥을 세운 현재의 구암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구암교회는 1890년대 초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7인의 선교사 중 한 명인 윌리엄 전킨(Junkin, 전위렴)과 선교사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이들의 어학 선생 장인택 조사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전킨은 영명학교(현 군산제일중고),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 구암예수병원 등을 세워 교육, 의료 등을 보급함으로 군산 신문화의 효시가 되었고, 특히 민족운동,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한 학생들을 길러냈다. 구암교회가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 발원지가 된 이유는 이에 근거한다.

교회 위쪽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바다와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암동산에 닿는다. 지난해 6월, 이 터에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세워졌다. 교사와 학생이 주도적으로 3·5만세운동을 이끈 ‘영명학교’를 재현, 3층 규모로 조성한 이 기념관에는 100년 전 그날의 기운과 함성이 밀도 높게 들이차 있다. 

 

1919년 2월 26일. 구암교회 교인이자 영명학교 졸업생,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의 손에는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지사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김병수는 구암교회 장로이자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한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3,500장을 인쇄, 수백 장의 태극기를 더 만들어 3월 6일 서래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거사 기밀이 누설되어 3월 5일, 일본 경찰들이 학교를 급습한다. 이때 주모자 박연세, 이두열이 체포되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김윤실, 김수영, 고석주 교사와 학생들이 즉시 석방 시위를 결의, 예수병원 직원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불어난 군중 5백여 명이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면서 시위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군산공립보통학교 방화사건, 대화정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등 3·5만세운동의 여진은 지속되었다. 제1차 만세운동 관련자 공판을 앞둔 3월 30일 밤 9시경, 수백 명의 군중이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야간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과 헌병은 총을 쏘고 칼로 찌르는 등 무자비한 탄압으로 현장을 피로 적셨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를 수색, 독립선언문 2천여 장을 압수하고 학교 기물을 모조리 부수었다. 교사 전원이 연행되었고 학교 수업은 중단되었다. 예수병원 직원들도 전원 구속되어 병원 운영도 마비되었다.

3·5만세운동 이후 군산에서는 5월까지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28회 의거에 참가한 인원은 3만 700명, 이 중 53명이 사망, 72명이 부상당하고, 195명이 투옥되었다.

기념관은 1층 추모 기록실, 2층은 역사 재현실, 3층은 체험 교실로 구성되었다. 1층에서 역사 현장의 기록을 읽고 난 후 2층으로 올라가면 피로 얼룩진 한 두루마기와 마주하게 된다. 구암교회 집사이자 영명학교 교사였던 문용기의 혈의를 재현한 것이다. 실제 옷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헌병의 무차별 진압 속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그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당당하게 군중 앞으로 나아갔다. 헌병이 휘두른 칼에 오른손이 잘렸으나 그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들고 다시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은 그는 뛰어가면서 만세를 외치다 결국 격분한 헌병에게 난자되어 순국하게 된다.

 

구암동산에 불어오는 바람은 강하고 거칠었다. 함께 현장을 둘러보던 구암교회 담임 김영만 목사의 눈살 아래 당위를 뜻하는 의지의 기색이 드러났다. 

“기억해야 해요. 3·1운동 정신 위에 이 나라와 이 나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암교회는 해마다 그날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3·5만세운동’을 교인들과 학생, 마을 사람들 수백 명이 재현하고 있다. 모든 생각과 사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께가 끼기 마련이나 그날의 해방과 저항의 정신은 구암동산에서 여전히 명징하다.

 

 

 

유관순의 신앙과 나라 사랑 정신의 뿌리

천안 매봉교회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뿌리인 천안 매봉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오를 지나면서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따사로운 햇볕 때문인지 언 몸이 조금은 풀리기 시작했다.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하는 추운 날씨에도 강가에서 홀로 자맥질하는 물새 한 마리의 의연함이 문득 ‘그날’의 정신과 항거에 빚져 있는 우리의 삶을 엿보게 했다. 

매봉교회와 담장을 맞댄 유관순 생가. 뜨락을 거닐며 몇몇 사람들이 유관순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아우내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민족 독립을 향한 열망을 안고 분연히 일어선 열일곱 소녀의 간절한 외침이 한 세기 동안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것일까.

 

매봉교회의 처음 이름은 ‘지령리 야소교당’이다.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스웨러(W. C. Swearer, 서원보)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교회의 역사는 유관순의 삶처럼 무시무시한 폭력의 현장 속에서도 강건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매봉교회 교인들은 군비 마련을 도왔다. 의병에 참가한 교인도 있었다. 일제는 의병에 참가한 세 명의 교인을 총살하고 교회를 불살랐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82명의 교인이 돈을 거둬 대한매일신보에 보냈다. 이 일로 일제는 다시 한번 교회를 불태웠다. 1908년, 선교사 케이블(E. M. Cable, 기이브)에 의해 전도된 유빈기가 불탄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는 유관순의 가까운 친척이다. 매봉교회는 진명학교를 설립해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미신타파운동, 한글보급운동, 농촌계몽운동,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매봉교회에서 신앙을 키우던 유관순도 진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녀는 선교사 엘리스(Alice Hammond Sharp, 사엘리사) 의 도움으로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정동교회를 출석하던 그녀는 손정도, 이필주 목사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다. 지령리에서 싹 틔운 나라 사랑 정신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대를 조직,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목놓아 만세를 외쳤다. 일제가 3월 10일부로 각급 학교 휴교령을 내리자 그녀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때 사촌 언니 유예도도 동행했다.

유관순은 매봉교회 교인들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알렸다. 교인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의,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거사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거사 전날 매봉에서 봉화를 올리면 각 지역 책임자들도 봉화를 올리고, 당일 나눠 줄 태극기를 준비하기로 논의했다. 유관순은 유예도와 함께 연락 작업을 시작했다. 교회 청년들과 태극기도 만들고 매봉산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거사 전날 봉화를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짓밟힌 민초들의 가슴에 끓어올라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 3천여 명이 모인 것이다. 조인원의 주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 유관순이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선창한 후 군중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가슴에 불로써 꿈틀거리던 ‘소리’를 토해내었다.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19명이 즉사했고, 유관순의 부모도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과 매봉교회 지도자들은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공주 일본 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고, 1919년 6월 30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그녀는 항거했다. 옥중 3·1절 1주년을 맞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옥중 시위는 담 바깥으로 번져 나갔다. 그녀는 모든 일의 주동자가 되어 모진 매질과 폭력, 모멸과 수치를 몸으로 견뎌야 했다. 방광 파열상을 입기도 한 그녀는 잔인한 헌병의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1920년 9월 28일, 여름 화초같이 싱그러운 열여덟 나이에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한 것이다.  

유관순 생가 뒤편 잎 떨어진 앙상한 나무 우듬지에 새가 날아와 앉는 바람에 가지가 휘청거렸다. 생가 안으로 들어서니 마음속에 움터 오르는 열일곱 소녀가 걸어오는 듯했다. 매봉교회 박윤억 담임목사의 시선이 건넛방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있는 유관순 조형물에서 잠시 머물렀다.

 

“유관순 열사는 어릴 때부터 희생적이었다고 하더군요. 동료들에게 자기 먹을 밥을 주고, 빨래도 대신 해 주고, 방학 때면 고향으로 내려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고 실천한 사람이었지요.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누가,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던가요? 입으로는 그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 배 채우기 바쁘죠. 3·1운동 100주년이 되었어요. 희생과 섬김의 정신, 그 신앙의 근본적인 자세를 다시 한번 우리 교회가 깊이 숙고하길 소망합니다.”

박 목사는, 그리고 나는 유관순의 생가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학살’의 아픔과 슬픔이 깃든

화성 제암교회

군산에서 시작된 일정은 천안을 거쳐 경기도 화성으로 이어졌다. 저녁으로 향하는 고즈넉한 작은 마을은 추워 보였다. 청명한 하늘 때문인지 3·1운동순국기념탑이 멀리서도 맑았다. 

제암교회 1층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에서는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제목으로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100년 전, 한가롭고 조용한 이곳에서 광기 어린 살육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몸을 떨었다. 자유와 독립을 꿈꾸던 무고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무참하게 흘린 붉은 피가 강을 이루어 이곳에 흘렀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경기도 화성의 작은 마을 제암리에서도 그 운동의 불길이 솟구쳤다. 4월 5일 발안장터에서 격동하는 듯한 만세 소리가 땅을 울린 것이다. 일본 헌병들의 모진 매질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사람들은 소리를 꺾지 않았다. 교인들은 상처 난 몸을 끌고 교회로 와서 기도한 후 다시 나가 만세를 외쳤다.

4월 15일 오후 2시,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는 헌병들을 이끌고 마을로 들이닥쳤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열흘 전 시위 진압 과정 중 일어난 폭력을 사과하고 싶다며, 15세 이상 남자 교인들은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명단까지 파악한 헌병들은 밖으로 나간 후 출입문과 창문에 각목을 대고 못질을 해서 안에 있던 교인들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석유를 뿌리고 초가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지붕 위로 치솟은 불은 맹렬한 기세로 교회를 삼켰다. 날카로운 비명이 뒤섞이면서 교회 밖으로 찌르듯이 튀어나왔다. 불타는 교회를 향해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교인들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그때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한 여인이 예배당 뜰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이유를 묻는 헌병에게 그녀는 “내 남편이 저리 죽어가고 있는데 울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소리 질렀다. 헌병은 장도로 그녀의 머리를 베었다. 피를 흐르며 구르는 그녀의 몸에 볏짚을 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 권사 한 명도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남편을 부르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다. 교회 안에서 남자 21명, 교회 밖 뜨락에서 여자 2명, 23명은 그렇게 비명횡사했다. 헌병들은 제암리 33채 초가집까지 모조리 불태웠다. 당시 사건 이후 제암리에는 “예수 믿다 망한 집, 예수 믿다 망한 동네”라는 가슴 아픈 소문이 돌았다. 

 

제암교회 강신범 원로목사는 1980년 3월에 부임했다. 32년간 시무하다 2012년 4월 은퇴했다. 강 목사는 1982년, 당시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가매장되어 있던 유골들을 수습, 제암교회 뒷동산에 합장했다. 2001년, 참담한 슬픔이 깃든 이곳에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성역화 사업으로 공원이 조성되었다.

23살에 남편을 잃고 96세까지 살다 세상을 떠난 전동례 할머니. 강 목사에 따르면 그녀는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오후 2시면 어김없이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강 목사는 전동례 할머니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상황이 어떠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늘 그 시각이면 예배당으로 오셨어요. 주님 앞에 엎드리셨지요. 1992년 11월 8일 수요일이었어요. 날씨가 서늘한 날이었어요. 한 번도 예배를 빠지지 않던 전동례 할머니가 안 오셨어요. 아내하고 심방을 갔더니, 마침 동네 아주머니도 마실 와 있더군요. ‘환란과 핍박 중에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자신의 간증과도 같은 찬송들을 함께 불렀어요. 가사도 안 보고 부르실 정도로 할머니의 기억력은 깨끗했지요. 말씀을 전하고, 사양하시는 걸 억지로 눕게 하고, 한 손은 이마에,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얹고 기도했어요. 

간절하게, 진심을 다해, 영혼을 위한 깊은 기도를…. 그런데 기도 중에 할머니의 심장이 멈추더군요. 아, 고난받은 여종의 기도를 날마다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품에 안으셨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었지요.”

아픔과 고통, 고함과 절규, 슬픔과 열망이 한데 뒤섞여 3·1운동의 정신으로 발효된 제암리, 그리고 제암교회. 이 역사의 현장에는 사죄의 마음을 안고 방문하는 일본인들도 많다. 1965년 일본인 오야마 레이지 목사는 사죄 여행단을 이끌고 이곳을 찾았다. 비가 새는 초라한 예배당을 보고 마음이 무너진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새 교회 건물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용서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희생자들을 합장한 묘소 앞에는 순국선열 23인의 넋을 기리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계승하기 위한 23개의 상징 조각물이 세워져 있다. 크고 작은 돌기둥은 순직할 당시 나이를 뜻한다. 높이 솟은 기둥은 발전과 자유, 기둥의 원은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미래 세계를 상징한다. 그 기둥 앞에서 나는 강 목사에게 물었다. 한 세기 전에 일어났던 3·1운동이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어냐고. 그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을 읊조렸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마지막에 승리의 개가를 불러야 해요. 사도 바울처럼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오늘을 사는 나는 어떤 신앙의 흔적을 남길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고,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오늘의 내 모습을 점검해야 합니다. 3·1운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정신이 무엇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1919년, 한국 인구는 약 2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기독교인은 1% 정도인 20만 명 정도. 그러나 3·1운동에서 기독교는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 민족의 고난 앞에서 교회는 기꺼이 함께 고난을 받은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게, 크리스천들에게, 그리고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내게, 이 역사적 사실이 주는 울림은 너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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