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를 멈추는 첫발, 돌이킴

story 2020년 03월호 후회를 멈추는 첫발, 돌이킴 글 백소영

“내가 매일 밤 도망쳤던 건, 그 사고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었더라고.”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박민국 원장이 역대급 ‘고백’을 했다. 네티즌들의 평가에 따르면 사랑 고백보다도 가슴 떨리는 짜릿한 고백이었단다. 그럴 만도 하다. 민국은 본원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외과 의사다. 이사장이 미래 병원의 청사진을 공유하며 차세대 리더로 신뢰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자타공인 최고라 자부하는 박민국 원장을 거슬리게 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분원의 외과 의사 부용주! 최근 두 번째 시리즈로 안방극장을 찾은 〈낭만닥터 김사부〉 이야기다. ‘김사부’는 닥터 부용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첫 번째 시리즈를 본 시청자라면 그 사연을 아실 테지만 차차 본문에서 풀어나가기로 하고, 우선은 민국의 서사에 집중하려 한다.


“아니, 왜 자꾸 나한테 시비요?” 자기도 사고가 난 버스 안에 있었고 한 팔을 못 쓰는 상황에서 응급 환자 둘을 살려내고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김사부를 민국이 막아서자, 결국은 김사부가 물었다. “당신도 기억하잖아? 그런데 왜 모른 척해?” 민국은 11년 전 버스 사고를 소환한다. 아마 김사부와 박민국이 함께 타고 있던 버스가 사고를 당했었나 보다. 금세 불이 날 만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사부는 옆의 부상자를 돌보고 있었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민하던 민국은 자기 살자고 도망을 쳤다.
“그 버스에서 도망치고 난 뒤, 난 매일 밤 버스에서 도망치는 악몽에 시달렸어. 그러다 당신을 다시 만난 순간 깨달았지. 내가 매일 밤 도망친 것은 그 사고가 아니라 당신이었다는 걸. 당신은 남았고, 나는 도망쳤잖아. 그래서 계속 나를 그렇게 조롱했던 거잖아. 긴장성 기흉 쪽지를 보낸 순간부터 쭉…. 지금도 속으로는 날 비웃고 있겠지. 잘난 체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계속해서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날 몰아붙였잖아. 너 같은 거 가짜라고, 의사라는 놈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비겁한 놈이라고.”


하지만 김사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시선이었다. 11년 전 버스 안에 민국도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일이었다. 그 사고로 다쳤는지 도망쳤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응수하자 민국은 열패감에 더 팔짝팔짝 뛰었다. 그런 민국을 보다가 김사부는 무심한 듯, 그러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거 하나만 말해 둡시다. 그날 사고는 당신 탓도 당신 책임도 아니었소. 비참하고 끔찍했고,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고.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 살기 위해 도망쳤다고 어느 누가 당신을 비난할 수 있겠어? 못 해! 어느 누구도! 해서도 안 되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 버스 안에서, 나와요.”


그러면서 민국에게 다가가 한 팔로 어깨를 다독이는 김사부와 그를 바라보는 민국의 표정을 읽으며 한 네티즌은 실시간 톡방에서 소리쳤다. “야, 이제 박민국도 우리 편이다!” 그러게 말이다. 실리만을 따지는 병원 이사장의 오른팔로 등장했던 민국이 결국 자의로 ‘너를 살리자고 나는 돌아볼 생각을 잊는’ 의사의 ‘낭만’을 알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하, 이쯤 되면 김사부는 사람이 맞나 싶기도 하다. 그 인격이 보통을 넘어 거의 신의 경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민국에게 보여 준 넉넉한 위로는 김사부 역시 그 고통을 겪었고, 빠져나오기 애썼던 지난한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부용주라는 본명으로 불리던 시절, 본원의 스타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며 제법 자만심도 가졌던 그때에는 그도 병원의 비리를 슬쩍 눈감아 주고 살았었다. 모두가 자기에게만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하자 병원은 집도의 이름에 부용주의 이름을 넣고 대리 수술을 일삼고 있었는데, 마취 이후에야 수술방 스태프들만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모를 완전범죄였다. 찝찝하기는 했지만 병원도 먹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큰 병원 규모를 유지하려면 그 정도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혹시 부용주 선생님을 아세요?” 자신을 의과 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환자가 병원 로비에서 해맑게 말을 걸어 왔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이름값에 지쳐 있었는지 그저 슬쩍 모른 체했다. “나는 김 아무개요.” 이후 수술 날을 기다리던 그 학생 환자는 병상에서도 의학 서적을 읽으며 모르는 것은 “김 사부님, 김 사부님~” 참새처럼 자신을 불러댔다. 귀여웠고, 대견했다. 하지만 심각한 수술이 아니니 누가 하든 잘 회복되리라 생각해서, 잊었다. 바빴으니까. 나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러다가 그 학생의 ‘테이블데스’(수술실에서 사망하는 것) 소식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도의 이름은 부용주! 관행처럼 그저 넘겼던 일이 자신을 사부님이라고 따르던 학생의 죽음을 불렀던 거였다. “선생님께서 직접 수술해 주신다고 얼마나 기뻐했는데….” 사정을 모르는 학생의 어머니는 그저 하염없이 울며 수술 전 학생이 남겼다는 작은 선물함을 건넸다. 정성스레 꾹꾹 눌러 쓴 편지엔 그녀가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말을 걸고 싶어 다가갔는데 차마 아는 척하기 부끄러워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 사부님으로 모시는 분에게 수술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는 것, 그리고 얼른 나아 자기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각오가 적혀 있었다. 울고 또 울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병원의 비리보다 그걸 그냥 넘어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김사부, 그 이름은 결코 영광의 이름이 아니었다. 부용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후 김사부로 살아가면서 매일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가 떠올리고 새겼을 사건은 너무나 자명하다.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살다 보면 후회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나? 그럼에도 어떤 잘못은 너무 치명적이다. 부용주의 후회처럼 나를 신뢰하고 따르던 제자의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박민국의 후회처럼 의사로서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살고 싶었던 자부심에 큰 상처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매일 밤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날이 자꾸 되살아나 나를 괴롭히는 것이리라.


김사부는 민국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민국보다 먼저 그 후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달은 인간이다. 가장 부끄러운 호칭 ‘김사부’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버리면서 오히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매일 그 사건을 대면하는 자다. “이제 그만 그 버스 안에서 나와요.” 김사부가 민국에게 했던 그 진심 어린 말은 그 사건을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날의 도망침을 후회하면서 삐뚤어진 열패감으로 자기는 물론 다른 이들도 괴롭히는 일을 그치라는 조언이다. 민국은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돌담병원 근처에서 갑자기 벌어진 버스 사고 현장에서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안에 의사가 한 분 계셔서 상황을 지휘해 주고 있습니다.” 구조 대원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으며 그 의사가 김사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민국은 순간 망설이기는 했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원장이고 돌담병원을 책임져야 하고 앞으로 미래 사업을 이끌어야 하는 중차대한 인물이니,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또 한 번 내 살길을 도모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통 체증으로 접근이 어려워지자 응급 상자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온 전공의들의 눈을 마주하며, 민국은 결국 버스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거다. 역설적이지만 후회를 멈추는 길은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그 발걸음이다. 후회의 그날로부터는 나와야 하지만, 그 나오는 첫걸음은 그 사건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날과는 다른 각오, 즉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앞으로 그의 닉네임을 ‘박버스’라고 부르고 싶어지는데, 나도 아재 개그를 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백소영은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강의로, 글쓰기로, 그리고 대중 특강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배우고 삶에 관여하는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저서로 「드라마틱」,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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