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8일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는 한평생 ‘간호의 길’을 걸어온 김수지 교수의 천국 환송 예배가 드려졌다. 병든 환자들을 돌보고 보살피느라 정작 자기 몸 살피는 일은 뒷전이었던 그녀가 급성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결국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일곱 살 나이에 간호사의 꿈을 품은 뒤 한 번도 꿈이 바뀌지 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우리나라 ‘간호학 박사 1호’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잉꼬부부로 소문이 자자했던 남편 김인수 교수(2003년 소천) 곁으로 떠난 김수지 교수는, 어머니의 길을 좇아 간호의 길을 걷고 있는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인 딸 김수를 비롯해 김인, 김지인 세 남매를 두었다. 간호계의 큰 별, 김수지 교수의 헌신되고 일관된 삶의 이야기를 되돌아본다.
글 서진아 사진 한치문, 정종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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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사람 돌봄 이론’
2001년 4월 김수지 교수는 유엔국제개발기구의 한국 주재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국제나이팅게일재단에서 주는 국제간호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축하 전화였다. 국제간호대상은 ‘간호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만큼 영광스러운 상이다. 간호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 정신질환자를 간호하면서 개발한 ‘사람 돌봄 이론’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환자 가운데 치료 기간이 길고 치유가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정신과 환자이다. 정신 질환 치료는 1~2년 안에 회복되지 않을뿐더러 회복 후 일상에 복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재발의 위험도 있다. 이 환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간절한 기도가 사랑 돌봄 이론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람 돌봄 이론은 알아봐 줌, 동참함, 나눔, 경청함, 동행함, 칭찬함, 안위해 줌, 희망 불어넣음, 용서함, 수용함의 10가지 돌봄 행위에 바탕을 둔다.
환자를 귀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알아봐 주고, 온 마음과 몸으로 정성을 다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곁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말벗이 되어주고, 환자의 슬픔이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등의 돌봄 행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평생 다른 사람의 몸과 영혼 회복을 위해 헌신한 김수지 교수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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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아니면 안 돼요!
7남매의 맏딸이었던 김수지는 지독히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일을 하러 나가시면 어린 수지는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어느 날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시골 교회를 찾아 들어간 수지에게, 그날 이후로 교회는 그녀의 놀이터가 되었고, 피난처가 되었고, 꿈을 일깨워준 비전의 장소가 되었다.
김수지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8년에 여수순천10·19사건이 일어났다. 총살의 위기에서 부상을 당한 채 가까스로 살아난 한 남자를 밤새 돌봐주던 한 여인이 있었다. 옆에서 살리지 말라고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그 남자를 정성스럽게 간호했다. 그 남자는 가까스로 살아났고, 그것을 옆에서 죽 지켜보던 김수지는 그 여인에게 물었다.
“아줌마, 뭐하는 사람이에요?”
“응, 나 간호사야.”
바로 그때, 김수지는 결심했다.
‘나도 간호사가 되어야겠다!’
뛰어난 성적으로 숙명여고를 졸업한 김수지는 학교에서 추천하는 전도유망한 학과를 다 마다했다. 어릴 적부터 품었던 간호사의 꿈을 이루려면 무조건 간호학과에 입학해야 했다. 입학금이 없어 우여곡절 끝에 마감 직전 등록금을 마련해 들어간 이화여대 간호학과. 간호사로서 그녀의 인생이 시작되는 관문이 되어주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난 예비 간호사
김수지는 대학에 들어가 정식으로 간호학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집에 가면 어린 동생들을 앉혀놓고 그날 배운 공부 내용을 설명해 주고, 직접 실습도 해보였다. 대학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재밌고 신나게 공부했다. 실습 시간마다 간호사복을 입고 병실에 들어가면 물 만난 고기마냥 신이 나고 에너지가 넘쳤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살피며, 특성에 맞게 돌보는 일에 행복감을 느꼈다.
김수지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나는 나의 일생을 깨끗하게 살며 내 직무에 충실할 것을 하나님과 여기 모인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삼가 서약합니다. 남에게 해로운 일은 무엇이나 하지 않겠으며 해로운 약인 줄 알고는 자기나 남에게 쓰지 않겠습니다….”
이 선서를 하는 동안 김수지는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군림이 아닌 섬김, 힘이 아닌 사랑, 말만이 아닌 행동, 소유가 아닌 베품,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했다. 더불어 생각했다.
‘예수님처럼 낮고 천하고 병든 자를 간호하며 살리라.’
그때의 그 다짐에 답하듯 김수지는 낮고 천하고 병든 자를 섬기고, 사랑하며, 베푸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문득 품었던 꿈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귀한 열매로 맺어지는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다
학교 수업, 클럽 활동,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봉사활동, 가정교사까지, 대학 생활 내내 엄청나게 바쁜 와중에 김수지는 연애를 했다. 상대는 고졸 출신으로 당시 국제전신전화국에 다니던 김인수 교수(훗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되었다.)였다. 연애 시절 6년 동안 무려 2400통의 편지를 교환한 일화는 워낙 유명하여 그 편지가 책으로 엮어져 나올 정도였다.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서로 사랑해 결혼했지만, 결혼의 위기는 의외로 금세 찾아왔다. 식습관, 수면 패턴, 정리 습관 등 사소한 것부터 사고방식과 서로에 대한 기대까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혼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김수지가 남편에게 이혼을 해야겠다고 말하자 남편은 “결혼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성경에 결혼 생활에 관한 말씀이 있으니, 우리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해 봅시다.”라고 했다. 그날부터 부부는 창세기 1장부터 읽으며 ‘결혼 생활’에 대한 말씀을 뽑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결혼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다. 이후로 부부는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김수지의 책 「사랑의 돌봄은 기적을 만든다」에 적힌 남편 김인수에 대한 기록이다
“남편은 늘 나의 곁에서 필요를 알아봐 주고 나의 모든 일에 동참해 주었다. 생각과 꿈을 함께 나누고, 소소한 말과 불평조차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나의 아주 작은 장점까지도 칭찬해 주곤 했다. 또 내가 속상할 때 나의 편이 되어 위로해 주고,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나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따금 내가 화를 내면 ‘미안하오. 용서해 주오’라고 하며 먼저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그리고 출퇴근 시 늘 현관에서 포옹으로 보내며 맞아주던 남편의 그 따스한 정을 나는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간호학 박사 1호’가 되다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자 김수지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조무사, 간호사를 거쳐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공부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받은 석사학위를 인정해 주지 않아 석사 과정부터 다시 밟아야 할 상황이었다. 생소한 용어도 많았고, 언어도 완벽하지 않아 남보다 몇 배로 공부해야 했다.
남편이 깨지 않도록 화장실 변기에 앉아 밤새 불을 켜고 공부하며, 미(美) 국무성에서 주는 특별 장학금까지 받았다. 김수지와 김인수 부부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빠듯하게 살면서도 장학금을 받아 시댁과 친정에 거르지 않고 생활비까지 보냈다. 그런 노력으로 석사학위를 인정받고 바로 박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식에서 김수지는 입학 동기 6명 중 유일한 박사학위 수여자가 되었다. 석사학위 수여자는 200명, 박사학위 수여자는 김수지 혼자였다. 더불어 김수지는 대한민국 ‘간호학 박사 1호’로 신문마다 크게 보도되었다.
체신고등학교 출신 김인수가 박사학위를 받고, 카이스트와 고려대 교수가 된 비결이 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는 그 비결을 ‘PPC’라고 말했다. 스스로 약속하고(Promise), 약속한 것에 헌신하고(Commitment), 그 일에 집중하면(Concentration) 결실을 얻는다는 것이다. 김수지의 생각도 같았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을 내다 보니 어느새 목표 지점에 가 있게 되었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다.

죽음 앞둔 환자를 돕는 ‘호스피스 케어’
김수지는 미국 하와이의 한 병원에서 근무할 때 호스피스를 처음 접하였다. 호스피스 케어란 ‘환자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총체적으로 돌봐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79년 국내에 호스피스를 처음 소개했다.
김수지가 돌보던 환자 중에 뇌암 말기 환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매일 아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죽으려면 빨리 죽어, 애비 속 태우지 말고….”
밤낮 술에 취해 아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를 보고 아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김수지는 그 환자에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아버지 잔소리를 하루라도 안 듣는 것. 그리고,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화 〈다잉 영〉을 보고 싶어요.”
김수지는 어떻게 해서든 환자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 휠체어에 태워 종로 3가 세기극장으로 갔다. 날씨는 몸이 얼어붙을 만큼 추웠고, 영화는 전석 매진이었다. 매니저를 부르자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대하더니 사정 이야기를 하자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환자는 무척 행복해했다. 그날 밤 아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미안해요. 내가 아들 노릇 못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아들은 사흘 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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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비전과 도전, 그리고 안식…
김수지는 호스피스센터와 요양원, 정신사회재활센터를 건립해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늙어 가겠다는 비전을 품고 2004년 서울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이것을 계기로 2006년 서울사이버대학 총장이 되었고, 2009년에는 노인공동생활 시설인 요양센터를 개원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1년에는 서울사이버대학 총장 자리를 내려놓고 아프리카 최빈국 말라위로 선교를 떠났다. 말라위 릴롱궤 대양간호대학 교장으로 일하는 4년 동안 생애 마지막 헌신을 다했다. 그곳에서 급성 백혈병을 얻어 소천한 김수지는 생전에 남편 김인수 교수와 함께 서약한 대로 시신을 기증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김수지 교수는 자신의 책에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한평생을 오직 ‘간호의 길’을 향해서만 달려왔다.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간호 일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토록 해 왔고, 사랑의 돌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의 맛을 체험했으며, 특히 사랑의 돌봄을 통해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하는 증인으로서의 특권도 누렸기 때문이다.”
천국 환송 예배에서 전한 홍정길 목사의 설교로 글의 마지막을 대신한다.
“김수지 박사님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만났던 사람에게 늘 감동이었고 위로였고 기쁨이었습니다. 김 박사님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받았다는 사람,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한 참 귀한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