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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폭풍 걷히고 빛 비추리라
APC 선수위원장 이정민 |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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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회사 직원,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 노르딕스키 국가대표, 아시아패럴림픽위원회(APC) 선수위원장. 연결고리가 딱히 보이지 않는 특이한 이력은 그의 삶이 얼마나 다채로웠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린 시절에 갑자기 찾아온 질환으로 장애를 얻게 되면서 조금은 남다르게 살아야 했던 그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하나님 이야기를 sena가 들어보았다.

    취재·글│한경진 기자, <빛과소금> 매거진
    사진│정화영 기자, 이정민 

     

    언뜻 봐서는 건강해 보이는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신가요?
    전신 마비 후유증으로 양쪽 발목 근육이 심하게 약해져서 자유롭게 걷지 못해요. 지금은 보조기를 착용하고 걷고요. 남들보다 금방 피로해지고 오래 걸으면 발목에 통증을 많이 느껴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더 심해지는 게 느껴지는데, 아직까지는 어떤 수술이나 치료법이 없다고 해요. 

     

    열 살 때 병을 앓아서 그렇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혹시 기억나세요?
    주일이었는데, 전날부터 몸이 으스스해서 그날은 교회에 가지 못했어요. 조금 쉬고 나니 괜찮은 것 같아서 친구들하고 자전거를 타려고 밖에 나갔는데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는 그저 ‘어,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이어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올라서려는데 힘이 없어서 자전거를 놓쳤어요. 집에 와서 어머니께 몸이 이상하다고 말하고는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몸이 일으켜지지 않더라고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이 다 빠져서요. 바로 병원 중환자실에 두 달 정도 입원해 있으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어요. 마지막에 길랭바레증후군이라고 판명을 받았는데, 말초신경에 염증이 발생하는 급성 마비성 질환이에요. 처음에는 전신 마비 상태였다가 1년 반 동안 느리게 회복이 되었죠. 그런데 양쪽 발목과 손끝의 신경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어요. 다행히 생활에 큰 불편은 없고요. 손이 조금 떨리고 발목을 움직일 수 없어서 보조기 없이 걷는 것이 힘든 정도예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많이 힘드셨겠어요.
    저보다는 부모님이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저는 어려서 그냥 몸이 아프다고만 생각했는데, 부모님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우리 가정에 이런 고통을 주시나’라는 생각에 많이 힘드셨다고 해요.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어머니에게 “이 아이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이 아이를 사랑한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때부터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셨다고 해요. 어머니의 그런 밝고 긍정적인 성품 덕분에 저도 몸은 불편했지만 쾌활하게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병원에 있느라 1년 반 동안 유급을 하고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요. 그때도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밝은 성격 때문에 크게 상처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놀려도 나에게 장애가 있어서 놀리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정도로 어쩌면 마냥 순진하고 천진난만했죠. 남들은 다 알지만 저만 몰랐던 것이 바보 같긴 한데, 가끔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해요. 

     

    학교는 그렇지만 사회생활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첫 직장이 제조업 회사였는데, 언어폭력이 엄청났어요. 욕은 기본이고 인격적으로 하대하는 경우가 많았죠.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행동이 조금 굼뜨면 “아이씨, 그 다리 잘라버리든지” 하면서요. 그때부터 ‘장애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 손가락질 받는구나, 비웃음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주위 사람들이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나를 놀리는 말들이었고, 비웃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거죠. 그걸 깨닫고부터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했어요. 동시에 어떤 강박 같이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요. 작은 일 하나에도 예민해지고, 거슬리고, 상처받고 하면서요. 또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 때문에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게 되고, 그렇게 피폐하고 어긋난 삶이 시작됐어요. 

     

    스스로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당시에 제 상황을 알고 있던 어머니께서 가끔 책이나 CD 같은 것들을 보내주셨는데, 하루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보내주신 CD 하나가 눈에 띄어서 틀었어요. 브라운아이드소울의 <폭풍 속의 주>라는 곡이었는데, 해가 어슴푸레 떨어지는 시간에 차 안에서 그 곡을 듣는데 마치 제 얘기 같은 거예요. 가는 내내 울었죠. 마음에 어떤 아름다운 감동이 있었던 게 아니라, 솔직히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나님은 저에게 장애를 주셔서 제가 바닥까지 낮아지길 원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안 그럴 거예요. 하나님이 저에게 어떤 계획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세련되고 남부럽지 않게 살 거예요!”라고 선포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고는 폼나고 세련된 직장으로 가자는 생각에 퇴사를 차근차근 준비해서 한국계 대기업에 취업이 됐는데 입사 직전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요. 이어서 한국으로 돌아와 금융 회사에 들어갔는데 다리가 약해서 골프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 모임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영업도, 관계도 쉽게 풀 수가 없었죠.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치는 현실을 대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반항심도 점점 쌓여갔는데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무한도전> 조정 편을 보게 됐어요. 앉아서 하는 운동이라니! 저런 스포츠라면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조정 편에 출연했던 김지호 코치를 찾아갔어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연습 삼아 로잉머신을 탔는데, 난데없이 국가대표를 해볼 의향이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국가대표라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어요. 국가대표가 되어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잖아요. 고민 끝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죠. 

     

    엄청난 결정을 하신 거네요?
    맞아요. 회사 대표님도, 부모님도 반대하셨어요.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죠.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제가 생각한 국가대표, 제가 생각한 올림픽이 아니더라고요. 장애인 국가대표는 1년에 90일만 합숙을 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연습을 해야 하는 데다가 운동복 하나 지급되지 않았어요. 장애인 올림픽은 일반 올림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행사일 뿐이었고요. 그래도 어떡해요. 이미 결정했으니 바꿀 수도 없잖아요. 결국 모아놓은 돈을 모두 털어서 운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스포츠 행정을 공부하면서 2년을 버텼어요. 그런데 문제는 조정이 겨울에는 훈련할 수 없는 종목이라 겨울에 할 만한 훈련을 따로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크로스컨트리예요. 사비를 털어서 좌식 스키를 구하고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는데요. 내친 김에 동계체전에 나갔다가 금메달 3개를 따게 된 거예요. 마침 당시 동계체전이 실업팀 선수를 발굴하는 자리여서 금메달을 딴 저는 하루아침에 사비로 훈련하던 선수에서 실업팀의 지원을 받는 소속 선수가 되었어요. 게다가 곧바로 동계올림픽이 우리나라 평창에서 열리게 되어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연습을 할 수 있었죠. 

     

    드라마틱하네요. 그렇게 나간 대회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바이애슬론 7종목에 전부 출전하고, 바이애슬론에서는 7위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셨네요? 대단하세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물론 메달을 정말 따고 싶었기 때문에 너무나 아쉬웠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네가 메달을 따게 하기 위해서 장애를 준 게 아니야. 기다려. 그리고 눈 감는 날까지 너를 훈련시킬 거니까 항상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으렴.” 그 후로는 무슨 일이든 “또 뭘 주시려고 이렇게 훈련을 시키십니까”라고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대로 폼나게 살고 싶었던 제가, 높아지고 세워져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제가 이제는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께 다 맡기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앞으로는 뭘 보여주시든, 뭘 시키시든 다 계획이 있으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지금은 6년이라는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 9월에 열린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APC 선수위원으로 출마했다가 선수위원장이 되는 영광을 얻게 해주셨는데요. 이 일을 맡기신 만큼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아시아 지역의 많은 장애인들이 스포츠에 참여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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