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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상의 모든 풀꽃들에게 - 어느 노시인의 편지
나태주 시인 | 2020년 11월호
  • 부정적인 시어에는 세모, 긍정적인 시어에는 동그라미… 시를 보면 자동으로 잘게 다져 문제풀이용으로 분석하고 해체해버리는 데 익숙한 학생들에게 시인은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느끼는 데까지 나아가라고 주문했다. 짤막하고 평범한 일상의 언어들이 어떻게 영혼과 만나 파장을 일으키고 울림을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감동을 넘어 감격에까지 나아가는지. 가을이다, 이제는 가슴을 열어 시를 맞이할 시간이다.

     

    취재 | 김지혜 기자 · 사진 | 정화영 기자 

     

     

    -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초등학교 선생만 43년을 했어요. 이 시를 쓴 건 교장을 지낼 때였죠. 전교에서 말 안 듣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어느 날. 예쁨,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비결은 자세히,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는 것에 있더군요. 이름 없는 풀꽃도 자세히,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듯 자세히, 오래 보면 안 예쁘고 안 사랑스러운 아이가 없더라고요. 

    마치 당신이 그렇듯. 

     

     

    -

    잠들기 전 기도


    하나님

    오늘도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내일 아침 잊지 말고

    깨워 주십시오.

    -

     

    62세 봄, 쓸개가 터졌어요. 당시 의사는 죽을 사람이 왔다며 수술해봤자 소용없다는 매정한 말을 했지만, 보세요. 저 살아있잖아요. 현대 의학도 포기했던 제가 올해 76세입니다. 지금도 머릿속 동맥에 혹이 네 개가 있고 간도 삼분의 일은 잘라내고, 쓸개도 없고, 췌장과 콩팥도 반 이상 잘라내고 했는데도 살아있어요. 순전히 하나님께서 살리신 거죠. 그러니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이자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밖에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수밖에요. 

     

     

    -

    대숲 아래서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

     

    18살, 청소년기에 한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용기 내서 연애편지를 썼는데 여학생의 아버지께서 받으신 거예요. 첫사랑에 실패하고 연애편지 쓰는 심정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 시가 그때 쓴 시이고 제 신춘문예 등단작이기도 해요. 제 시는 세상에 보내는 ‘연애편지’예요. 18살의 시는 한 여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였다면, 점차 대상이 넓어져 이제 제 시는 세상에 보내는 연애편지가 되었어요. 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때까지 세상에 ‘연애편지’를 보내는 ‘서비스맨’으로 살 겁니다. 이 사랑이 당신에게 닿기를. 

     

     

    -

    풀꽃·3


    기죽지 말고 살아 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

     

    손자가 일찍 어미를 잃었어요. 제게도 큰 아픔이었죠. 그런 아픔을 겪은 손자가 할머니랑 밖에 나갔다가 꽃을 한 송이 꺾어왔더라고요. 그 꽃을 꽃병에 꽂아주며 아이에게 한 말이 이 시예요. 우리는 모두 기죽을 수 있어요. 세상에는 우리를 기죽이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죠. 하지만 기죽지 말고 끝까지 잘 살아주기를 바라요. 청소년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한 때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니까요. 우리 모두 끝까지 잘 살아내서 하고자 하는 일을 꽃 피우는 걸 직접 보며 그 ‘좋음’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요.

     

     

    -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혹시 지금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나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인생의 핵심은 후반부에 있어요. 이 시에서도 앞부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도 핵심은 뒤에 있는 것처럼요. 논어에 보면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어요.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앞에 붙은 ‘절차탁마’라는 말이에요. 대기만성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칼로 다듬고 줄로 쓸고 망치로 쪼고 숫돌로 가는’ 온갖 노력이 대기만성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빨리 유명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저도 칠순이 넘어서야 조금 알려진 시인이 됐어요. 인생의 핵심이 후반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금수저 은수저들 부러워 말고 꿋꿋하게 방향을 잘 정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나아가다 보면 내가 바라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76세인 저도 아직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박목월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나는 오늘 저녁에 대표작을 쓸끼다”라고 말씀하셨죠.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오늘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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